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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그랑벨 성에서 파티


1화 퍼레이드의 끝은

콕로빈 :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야, 성황리에 끝났네요! 돌이라도 맞는 거 아닐까 걱정해서 그런지 열렬한 성원에 저도 안심했어요!

시노 : 솔직한 녀석.

콕로빈 : 에헤헤, 파티장은 저쪽입니다! 여러분 편히 즐겨주세요!

시노 : 알겠어. 저쪽 방은 뭐야? 저 박제는 뭐야?

히스클리프 : 시노, 두리번거리지 마.

시노 : 블랑셰 성보다 넓어.

히스클리프 : 그야 중앙의 국왕 폐하가 계시는 곳이니까. 변경의 성과는 비교가 안 되지.

시노 : 블랑셰 성이 더 좋아. 숲과 호수에 둘러싸여 있어서 아름다워. 주인님과 마님이 원하신다면 내가 블랑셰 성을 크게 만들어 줄게.

히스클리프 : 아버님도 어머님도 조용한 생활을 바라셔. 큰 걸 바라시는 게 아니야.

시노 : 나는 드리고 싶어. 이 세상에 있는 훌륭한 것들 전부. 히스에게도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어. 너에겐 민폐였나 보지만.

히스클리프 : …민폐였던 게 아니야. 늘 고마워했어. 시노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하니까. 열이 나서 누워있을 때도, 가정교사에게 혼나서 풀 죽어있을 때도 숲의 꽃이나 다람쥐를 보여주러 와줬지. 지금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

시노 : 동생? 동생은 너잖아?

히스클리프 : 하? 누가 봐도 네가 동생이잖아.

시노 : 아니, 내가 더 돌봐주고 있으니까. 네가 동생이지.

히스클리프 : 끈질기네. 시노야말로…

중앙의 귀공자 : 히스클리프? 동쪽 블랑셰 가의 히스클리프 아니야?

히스클리프 : 아…

중앙의 귀공자 : 기억 안 나? 아리스토크라시 아카데미의 학술시험장에서 만났었는데. 가장 우수한 성적이었고 무척 잘생겨서 인상에 남았었어. 너, 현자님의 마법사였구나.

히스클리프 : …아아.

중앙의 귀공자 : 대단한걸! 태생이 영웅이구나. 부러워. 괜찮다면 이따가 부모님께 소개…

히스클리프 : 그러지 말아줘.

중앙의 귀공자 : 아… 미안… 너무 들떴나 봐…

히스클리프 : 아니…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미안해…

시노 : 어째서야. 가주면 되잖아. 잔뜩 칭찬받고 오면 돼.

히스클리프 : 시노, 너와는 관계없는…

시노 : 현자의 마법사가 된 것도, 주인님을 닮아 머리가 좋은 것도, 마님을 닮아 미형인 것도 자랑하면 돼. 너는 내 자랑스러운 주인인데 네가 너를 부끄러워하면 내가 바보 같잖아.

히스클리프 : …시끄럽네. 시노는 몰라.

시노 : …그러냐. 평생 밑이나 보고 살아.

히스클리프 : …

시노 : …

아키라 : 시노, 어디 가요? 파티장은 반대쪽…

시노 : 돌아갈래.

아키라 : 아아, 돌아가… 네!? 고, 곤란해요! 기다려주세요! 벌써 없어졌어… 어디로 갔어요!?



2화 시노의 마음

시노 : …

아키라 : 있다…! 기다려요, 시노…!

시노 : 앗…! 현자냐. 왜 뛰어들어?

아키라 : 하늘을 날면 못 쫓아가니까…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돌아간다니.

시노 : …히스랑 싸웠어.

아키라 : 히스랑? 왜 싸웠나요?

시노 : 히스가 부끄러워하니까. 히스가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면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키라 : 어째서…

시노 : …왜 궁금해하는 거야? 이것도 현자의 일이야?

아키라 : 일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된 저에게 히스는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니까요. 그런 히스와 사이가 좋은 시노가 왜 그에게 화가 났는지 궁금해요. 시노도 입은 거칠지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으니까…

시노 : …


시노는 가만히 나를 올려다봤다.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한다기보다는 내 정체를 탐색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다가가도 괜찮을지, 시치미를 떼며 모른 척 지나갈지 정하려는 고양이 같았다. 그리고 그런 고양이는 한번 다가오기로 결정하면 절대 겁먹지 않는다.


시노 : 나는 고아야. 가족의 얼굴은 몰라. 마법을 쓸 수 있는 만큼 먹고 사는데 곤란하진 않았어. 미움받는다는 말의 뜻을 알기도 전에 미움받는 것에도 익숙해졌어. 간단해. 친구를 바라지 않으면 돼. 어디에 있어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 이 마음은 상처받지 않아.


시노는 말한 대로 상처받은 모습이 아닌 당당한 모습으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런 시노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시노 : 그런데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운 좋게 블랑셰 가에 거두어졌어. 블랑셰 가는 천국이었지. 주인님도 마님도 히스도 다정하고 사이가 좋은 이상적인 가족이었어. 직접 얘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뻤어. 그런데 어느 날 마님이 나에게 직접 찾아오신 거야. 히스를 데리고. 시노, 마법사라고 했었죠? 히스클리프도 그래요. 그러니 앞으로 히스와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거기까지 말하고 가슴이 벅차오른 듯 시노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시노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애절할 정도로 순수한 무언가가 시노의 호흡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


시노 : …히스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마님이 말씀하신 그 순간… 처음으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했어. 마법사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마법사였기 때문에 마님이 말을 걸어주신 거야. 히스 도련님과도 친구가 될 수 있어. 기뻤어… 히스도 기뻐해 줬어. 이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자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요즘의 히스는 달라.

아키라 : 다르다니…

시노 : 마법사인 걸 숨기고 싶어 해. 주인님이나 마님께 나쁜 소문이 생기니까…

아키라 : …

시노 :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놈들은 어디든지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렇게 말해도 히스는 듣지 않아. 나에겐 자랑스러웠던 것이, 그 녀석에겐 마법사인 게 부끄러운 거야. 귀족 도련님이니 사정이 있겠지.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그 녀석이 바닥을 볼 때마다 나를 숨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를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현자. 나는 영웅이 되고 싶어. 대단한 마법사가 되고, 커다란 성이 필요해. 다들 한눈에 부러워할 정도로. 그걸 손에 넣으면 히스의 친구라고 말할 거야. 그럼 그 녀석도 부끄러워하지 않겠지?

아키라 : 시노…




3화 전별의 인사말

무지개를 좇아가는 어린아이처럼 시노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키라 : 그렇네요… <거대한 재앙>을 격퇴하고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어 시노만의 커다란 성을 세우기로 해요.

시노 : 가능하겠어? 정말로?

아키라 : 노력할게요. 좋은 현자가 돼서 활약하고, 제가 바라는 걸 들어주도록. 그렇지만 커다란 성이 없어도 시노는 히스의 자랑스러운 친구라고 생각해요.

시노 : …

시노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눈물을 참듯이 일렁였다. 입 끝을 올리며 시노가 웃었다.


시노 : 꽤 괜찮은 말이었어.

아키라 : 별말씀을… 파티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시노 : 참가할게. 맛있는 파이가 있다고 들었어. 마님의 파이가 더 맛있겠지만.

아키라 : 파이를 좋아하나요?

시노 : 좋아해.

히스클리프 : 시노!

시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히스클리프가 서 있었다. 그는 멋쩍은 듯이 목덜미를 매만지고 있었다.

히스클리프 : …파티가 시작할 거야. 현자님도.

아키라 : 지금 갈게요.

히스클리프 : 무슨 얘길 하셨어요?

시노 : 히스의 험담.

히스클리프 : 에!?

시노 : 거짓말이야. 가자.


시노는 웃으며 히스클리프의 손을 잡아끌었다. 히스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머지않아 이끌리듯 웃었다. 그들이 언제까지나 허물없이 사이좋게 있을 수 있는 그런 세계가 되기를 바랐다.


아키라 : (오늘 밤의 파티에서도 인간과 마법사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보잘것없겠지만, 내 나름대로)

드라몬드 : …이상으로 <거대한 재앙>과 싸울 사명을 짊어진 용사들… 현자님과 마법관의 마법사들에게 저, 마법 관리 대신으로부터 전별의 인사말을 올리겠습니다! 여러분 성대한 박수를!

클로에 : 와아, 대단해… 차려입은 사람들이 가득해. 예쁜 과자들이 가득해…

라스티카 : 그렇게 구석에서 보지 말고 이쪽으로 와, 클로에.

클로에 : 그치만, 그치만 진짜로 안 혼나? 우리 마법사잖아. 전에 어떤 축제에 갔을 때도…

아서 : 마법사가 주역인 파티야.

클로에 : 아서 왕자님…

아서 : 아서면 돼. 클로에. 멋진 로브를 만들어줘서 고마워. 오늘 밤은 즐기다 가줘.

클로에 : 고마워, 아서…! 아아, 꿈만 같아… 라스티카, 저쪽을 보러 가자! 아! 저쪽도!

라스티카 : 아하하, 좋아. 감사합니다. 아서 왕자.

아서 : 나야말로.

클로에 : 빨리 빨리!

라스티카 : 잠깐만, 끌지 말아줘.

아서 : 하하… 다들 사양 말고 즐겨줘. 마법사는 인간과, 인간은 마법사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도록 해. 오늘 밤은 인간과 마법사의 기념비적인 소개팅…

아키라 : 아, 아서! 이 자리에서 소개팅이라는 말은 조금…!

아서 : 그런가? 기념비적인 만남을 축하하는 연회니까. 그럼 건배!




4화 파티의 시작

무르 : 건배!

샤일록 : 건배. 작년보다는 좋은 샴페인이네요.

무르 : 그건 좋은 일이야?

샤일록 : 무척.

중앙의 학자 : 오오! 당신은 혹시 고명한 철학자 무르가 아니십니까?

무르 : 냐옹!

중앙의 학자 : …!?

샤일록 : 사람 잘못 보셨어요. 그냥 들고양이랍니다.

네로 : 역시 왕성의 음식이야… 좋은 밀가루를 쓰네. 그 녀석이 있었다면 분명 바쁘게 먹었겠지.

파우스트 : 그 녀석이라니?

네로 : …

파우스트 : 비밀이 많군.

네로 : …당신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이봐, 어디가.

파우스트 : 어디서 좀 쉴 거야. 병이 나은지 얼마 안 된 걸 핑계 삼아.

네로 : 말은 그렇게 하면서, 파티가 싫다는 게 본심이지?

파우스트 : 이 성이 싫다는 게 본심이야.

네로 : …?

중앙의 귀부인 : 춤을 무척 잘 추시네요… 마법사 중에 이렇게 신사적인 분이 계실 줄이야…

라스티카 :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부인.

중앙의 귀부인 : 아내 분은 있으세요?

라스티카 : 지금 찾고 있는 중이랍니다. 찾으면 제 새장에 영원히 가둬놓을 생각이에요.

중앙의 귀부인 : 어머, 농담까지 정열적이고 멋지셔라…

라스티카 : 농담 아니에요. 시험 삼아 당신도 새장에 들어가 보시겠어요?

클로에 : 라스티카! 어디 있나 했더니! 자 저쪽으로 가자!

라스티카 : …앗 실례, 부인. 언젠가 또.

클로에 : 라스티카는 정말 여자한테 무르다니까.

라스티카 : 클로에는 아직도 여자가 꺼려져?

클로에 : 조금은… 저 사람들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상냥해서 좋아. 내 옷 멋지다고 칭찬해줬어!

라스티카 : 다행이네.

루틸 : 활기차고 즐겁네요. 우리 학생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요.

레녹스 : 루틸의 학교 파티도 굉장했어.

루틸 : 감사합니다. 아, 저 모자 귀엽다! 학교에 있는 천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레녹스 : 클로에에게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도록 해.

루틸 : 네, 그럴게요!

카인 : 왜 그래, 리케. 모처럼의 파티인데 우울한 얼굴을 하고…

리케 : 카인은 들떠있네요… 옷깃에 입술 자국이…

카인 :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취한 귀부인한테 붙잡힌 것뿐이야.

리케 : 정말…?

카인 : 당연하지. 나는 절도를 지켜. 기사니까.

리케 : 하아…

카인 : 너는? 왜 그래?

리케 : 아까 퍼레이드 때 교단분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저를 노려본듯한…

카인 :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교단에 관한 건 잊어버리고 파티를 즐겨. 자, 과자도 있어.

리케 : 뭔가요, 이게… 주황색 과일에 진흙이…

카인 : 진흙이 아니라 초콜릿이야. 오렌지에 초콜릿을 묻힌 거야. 먹어 봐.

리케 : 이 진흙, 맛있어…!

카인 : 진흙 아니라니까.



5화 피가로의 권유

즐거운 파티를 바라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아키라 : 다들 즐거워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스노우 : 그렇구나, 그렇구나.

화이트 : 우리도 즐겁구먼.

피가로 : 현자님은? 즐기고 있어?

아키라 : 네. 그렇지만 이런 자리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피가로 : 헤에, 귀엽네. 즐거움이 부족하다면 나랑 춤추지 않을래?

아키라 : 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피가로를 보고 주춤했다. 피가로는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남쪽 마법사들은 다들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었지만 피가로만큼은 여유가 있어 보이고 묘한 박력이 있었다. 스노우와 화이트, 아서, 파우스트와도 아는 사이 같았다. 그런데 숨기려 하고 있어. 상냥해 보이지만 정체를 모르겠는 사람. 지금도 따뜻하게 웃고 있는 눈동자에 어딘가 섬뜩하고 차가운 빛이 깃들어있었다.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나는 압도당했다.


피가로 : 사양하지 마. 네가 남자여도, 여자여도, 노인이어도, 개여도, 재앙 그 자체라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안듯이 춤출게. 그리고 한순간의 정열적인 꿈을 나누어 갖자… 어때? 근사하지? 자, 손을.


우아하게 내민 손을 보자 긴장됐다. 피가로의 유혹적인 말이나 나를 상처입히지 않겠다는 듯한 미소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손을 잡으면 그대로 삼켜져 버릴 것만 같아 묘하게 무서웠다.


아키라 : 아… 아니요, 저는 사양할게요…

피가로 : 어째서.

아키라 : 아하하… 춤춰본 적이 없어서. 다른 분과 즐겨주세요.

피가로 : 네가 좋은데.

아키라 : 왜…

피가로 : 너를 농락하고 싶으니까.


피가로는 물러서지 않고 웃었다.


피가로 : 마법관을 통솔하는 현자를 내 수중에 두려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게 제일 빠르잖아.

아키라 : 네…?

피가로 : 사랑이란 신뢰하지 않는 상대, 미워하는 상대에게 마저 마음을 허락하는 행위니까. 그러니까 유혹하고 있는 거야. …어때? 나랑 춤추지 않을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심한 말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놀라서 피가로를 쳐다봤다. 그는 나를 바보 취급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냥하고 따뜻한 눈으로 나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아키라 : 이건 마법사식 농담인가요…?


피가로 : 글쎄. 확인해 보는 게 어때? 내가 너를 상처입힐 남자일지, 꿀처럼 단 남자일지. 독일지, 약일지… 네 손으로 확인해 보도록 해.


바다보다 깊은 시선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를 향했다. 무심코 손을 내밀려던 순간…



6화 술렁이는 파티장

미틸 : 피가로 선생님!

아키라 : …

피가로 : 그래, 미틸. 무슨 일이야?


미틸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까까지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피가로는 싹싹하고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미틸을 돌아봤다.


미틸 : 혼자서 막 가시면 안 돼요. 피가로 선생님이 과음하시지 않도록 제가 지켜볼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피가로 : 그랬었지. 미안미안.

미틸 : 몰래 숨어서 많이 드셨어요?

피가로 : 그런 예의 없는 짓 안 해. 현자님이랑 이야기를 했을 뿐이야. 그렇지, 현자님?

피가로는 능청스럽게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나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라 : 아… 네…

미틸 : 새해에 올해는 과음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피가로 선생님이니까요.

피가로 : 알고 있어. 미틸을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할 거야.

미틸 : 꼭이에요! 정말, 선생님은 내가 안 보고 있으면 안 된다니까. 다른 나라의 마법사들에게 바보 취급받지 않도록 남쪽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세요.

피가로 : 아하하… 선생님은 그런 거 잘 못하니까.

미틸 : 그러지 말구, 열심히!


피가로는 실없는 아빠처럼 미틸의 손에 끌려갔다. 좀 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동요하는 내 옆으로 그를 똑같이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스노우 : 무서워…

화이트 : 깬다…

아키라 : 스노우, 화이트…

스노우 : 미안하구나, 현자여. 피가로에게 다른 뜻은 없단다.

화이트 : 성격이 근본부터 나빠서 그렇지…

아키라 : 어… 어떤 사람인가요…


계속해서 물어보려던 순간 갑자기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중앙 사람 : 왕제 전하다!

중앙 사람 : 빈센트 왕제 전하가 오셨어!

아서 : 숙부님…


훌륭한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자 회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건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으로 다가온 카인이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카인 : 국왕 전하의 동생분이신 빈센트 왕제 전하. 아서 전하의 숙부 되는 사람이야. 나에겐 안 보이지만 당신에겐 보이지?

아키라 : 네…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분이 계세요. 아마 저분…

카인 : 국왕 폐하는 병이 심하셔서 아서 왕자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저분이 정무를 맡고 계셨어. 냉철한 합리주의자에 재능이 있는 자에겐 관용적이지만, 낙오자나 무능한 자에겐 굉장히 엄격하지. 마법 같은 불확실한 것보다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는 마법 과학의 힘을 좋아해.

아키라 : 마법 과학?

샤일록 : 서쪽에서 탄생한, 미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잿빛 기술이에요.


어느샌가 샤일록이 곁에 있었다. 그는 파이프를 피우며 드물게 한쪽 눈썹을 올리고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7화 마법 과학의 힘

샤일록 : 마나석을 원동력으로 과학 도구를 사용해 마법을 발생시키는 거예요.

아키라 : 그럼 인간도 마법을 쓸 수 있나요?

샤일록 : 네.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고.


차가운 한숨과도 같이, 샤일록은 파이프로 연기를 내뿜었다.


샤일록 : 마음도 몸도 쓰지 않고, 쾌적함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도대체 그런 것에 무슨 쾌락이 있다는 걸까요. 저는 어떤 욕망이라도 사랑하지만, 너무나도 멋이 없고 나태하며 상상력이 부족해.

카인 : 당신의 생각은 재밌네. 인간이 마법을 쓰는 게 싫은 것이 아니라 미의식이 결여돼서 싫다는 건가.

샤일록 : 저는 바의 주인이니까요.


샤일록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나와 카인을 살펴보았다.


샤일록 : 미주는 유혹을 하죠. 미주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쾌락에는 유혹이 뱀처럼 숨어있답니다. 그 유혹은 강력한 마법처럼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요. 그렇기 때문에 절도라는 것이 아름다워. 그 어떤 미녀의 유혹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성직자의 고뇌처럼, 쾌락을 앞에 둔 이성이 가장 관능적이잖아요?

카인 : 동의할지 말지를 떠나서… 당신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니 왕궁의 파티장이 밤의 라운지처럼 되네…

샤일록 : 절도도 이성도 없는 쾌락엔 갈등이 없어요. 갈등이 없는 것은 깊이가 없고, 깊이가 없는 것은 재미가 없어. 마법 과학은 값싼 술처럼 많은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겠지만… 언젠가 이 세계가 경험해본 적 없는 최악의 숙취를 불러올 거예요.

??? : …


샤일록의 말이 다 들린다는 듯이 누군가가 그를 노려봤다. 샤일록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아서가 빈센트 씨에게 가까이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아서 : 빈센트 숙부님. 어서 오세요.

빈센트 : 예년처럼 떠들썩하니 보기 좋구나. 예년처럼 <거대한 재앙>을 격퇴하지 못하고 수많은 희생을 냈는데 말이야.

아서 : 그것은…

빈센트 : 알고 있다. 축하하는 자리니 이 이상은 언급하지 않으마.

아서 : 네…


아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빈센트 씨를 대신해서 그의 대각선 뒤에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샤일록을 노려봤던 사람이다.


니콜라스 : 마법 과학성 소속의 특수부대. 마법 과학 병단 단장인 니콜라스라고 합니다.

아서 : 알고 있어. 전 기사단장이었고 서쪽으로 마법 과학 기술을 배우러 가 몇 달 전에 돌아왔었지.

니콜라스 :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우리 마법 과학 병단이 있으면 앞으로 현자의 마법사 같은 건 필요하지 않겠죠.


니콜라스 씨의 말에 파티장이 술렁였다. 마법사들 중 몇 명이 불쾌하단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노 : 잘도 말하네, 저 자식.

히스클리프 : 그러지 마, 시노.

카인 : 니콜라스 대장… 나한테 져서 기사단을 그만둔 주제에 마법 과학을 손에 넣어 우쭐거리기나 하고.

샤일록 : 값싼 술에 취한 자가 호언장담을 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죠.


나는 조마조마하며 아서와 니콜라스 씨를 봤다.


아서 : …무슨 의미야, 니콜라스.



8화 차가운 목소리

니콜라스 : 아서 전하와 기사 카인, 블랑셰 가의 귀공자를 빼면 마법사들은 그저 불량배들의 모임. <거대한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지키기 위해 진지하게 싸웠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빈센트 님이 말씀하신 대로 후일 엄밀하게 조사를 진행해 이번 사태에 대한 원인추궁을 해야 합니다. <거대한 재앙>의 위력이 강해진 것인지, 현자의 마법사가 태만했던 것인지.

아서 : 태만이라니… 말이 지나쳐, 니콜라스. 희생된 건 그들의 동료다.

니콜라스 :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서 전하.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동료가 어떻게 돌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들끼리 분열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지요.

아서 : 당치도 않은 소리를… <거대한 재앙>과 싸우기 전에 그들끼리 서로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야?

니콜라스 :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거대한 재앙>과 현자의 마법사의 전투는 비밀에 부쳐져 있으니까요. 전투에 참여한 마법사들은 영웅인 동시에, 큰 피해를 낸 전범이기도 합니다.


니콜라스 씨의 차가운 말이 울려 퍼졌다. 마법사들이 동료를 잃은 것은 그들이 제대로 행동하지 않아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샤일록은 눈썹을 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샤일록 : …파우스트가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네요.

무르 : 그러게! 저주받아 죽었을 거야!

카인 : 아서 님이 안 계셨으면 나도 때렸을 거야.

스노우 : 동쪽의 마법사도, 서쪽의 마법사도, 중앙의 마법사도 무섭구먼…

화이트 : 그러게 말일세. 온화한 건 우리 북쪽의 마법사들 정도…

히스클리프 : 북쪽 마법사의 어디가 온화한가요. 남쪽을 잘못 말씀하신 거겠죠. 루틸 씨나…


그 순간, 남쪽의 마법사 루틸이 니콜라스 씨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루틸 : 그 말은 무슨 뜻인가요!?

히스클리프 : …

샤일록 : 온화한 마법사는 없었네요.

무르 : 그렇네! 동서남북중앙 전부 호전적이네!

카인 : 동생 쪽의 성격이 세다고 생각했었는데 형 쪽도 만만치 않네.

스노우 : 대마녀 치렛타의 아이이니 말일세.

화이트 : 치렛타도 혈기가 왕성한 여자였지. 피는 거스를 수 없는 게야.

니콜라스 : 무례하다. 이름을 밝혀라.

루틸 : 남쪽의 마법사 루틸입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쓸모없는 자들이란 전투에서 죽은 남쪽 마법사들이나 살아남은 다른 분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니콜라스 : 그 말대로입니다. <거대한 재앙>의 접근을 막지 못하고, 유례없는 피해를 초래했지. 이걸 쓸모없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합니까?

루틸 : 그럼 <거대한 재앙>과 싸우지도 않았던 당신은 도대체 뭘까요? 당신이야말로 쓸모없음 그 이하 아닙니까?


루틸의 말에 평온하던 니콜라스 씨의 표정이 변했다.


니콜라스 : 무례한 마법사 놈…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건방진 태도가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아서 : 그만둬, 니콜라스! 이번 전투로 남쪽의 마법사들은 전멸했다. 그중에는 이자들의 지인도 있었어. 이런 축연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한 건 네 쪽이니, 너야말로 무례를 사과해야 마땅하지!

니콜라스 : 아서 전하! 오랫동안 왕가를 섬겨온 무가 출신인 저보다도 마법사 놈들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아서 : 마법사의 편을 드는 게 아니다! 나는 공정하게…




9화 방문객

빈센트 : 그리 몰아붙이지 마라, 니콜라스. 아서는 아직 어려. 마법사들의 편을 들어도 어쩔 수 없지. 친어미인 왕비에게 버려진 원한을 아직 떨쳐내지 못한 거다.

아서 : …저는 어머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빈센트 : 그래. 역시 마법사구나. 평범한 인간은 부모에게 버림받으면 부모를 원망하는 법이다. 평범한 인간에겐 이해가 되질 않아.

아서 : …어째서 저희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도, 루틸이 말씀드린 것도 뭐가 틀렸다는 겁니까!?

니콜라스 : 피해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당신들은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어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은 <거대한 재앙>이나 마법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서 : 모두의 도움이 되려 하고 있어! 나도, 이곳에 있는 자들도…

니콜라스 : 아서 전하는 그러실지 몰라도 다른 마법사들 또한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실제로도 전설의 마법사 오즈도, 북쪽의 마법사들도 지금 이 자리에 없지 않습니까.

아서 : 그건…

니콜라스 : 그자들은 이 세계도, 고통받는 사람들도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겁니다. 그러니 역할에서 도망쳐 희생을 냈습니다. 저를 쓸모없다고 한 남쪽의 마법사도 언젠가 도망칠 겁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제대로 교육을 해둬야지. 끌고 가라.

루틸 : 읏, 놔주세요…!

아서 : 그만둬, 니콜라스…!

미틸 : 형님…! 피가로 선생님, 어떻게 하죠…

피가로 : 곤란하네… 레녹스, 죽이면 안 돼.

레녹스 : 저는 당신이 아니니까요.

스노우 : 안 된다, 안 돼! 인간에게 손을 대지 말거라!

화이트 : <거대한 재앙>이 오기 전에 인간과 서로 죽이게 될 게야!


그 순간…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키라 : …!


맑은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바람도 없는데 실내의 불이 꺼지고 화려했던 파티장이 기분 나쁜 어둠으로 바뀌었다.


중앙 사람 : 힉…

중앙 사람 : 이, 이건 대체…

중앙 사람 : 설마… <거대한 재앙>이 다시 온 건…

빈센트 : 바보 같은…


덜컹덜컹 창문이 흔들리는 불온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범상치 않은 상황에 긴박한 정적이 감돌았다. 느닷없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 : 《アルシム》

중앙 사람 : …!? 뭐, 뭐야…!?

중앙 사람 : 마법의 주문…!?

스노우 : 지금의 목소리는…

화이트 : 혹시 미스라…!?

아키라 : 미스라…!?


미스라라는 이름에 나는 현자의 서에 적혀있던 말이 떠올랐다.


『미스라. max 요주의.
겉보기와 존댓말에 속지 않는 게 좋다. 짐승. 살해당할 거야.』


직후… 큰 소리와 함께 땅이 크게 울렸다.


아키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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