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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무너진 탑과 새의 그림자

1화 피가로의 비밀

미스라가 등 뒤로 오즈를 숨긴 아서에게 한발씩 가까이 다가갔다. 미스라의 오른손에 검붉은 빛이 모이자 오즈의 표정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미스라의 손을 잡았다.


미스라 : 이봐요, 위험하게.

아키라 : 미스라, 기다려요! 선택받은 마법사의 수가 줄어들면 <거대한 재앙>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럼 분명히 세계가 멸망하겠죠!

미스라 : …확실히.


오웬이 따분하다는 듯이 입을 비쭉거렸다.


오웬 : 잘 넘어가네.

미스라 : 오웬도 곤란하잖아요. 세계가 멸망하면 우리도 죽는다고요.

오웬 : 뭐, 그렇긴 한데… 모처럼의 기회니 팔다리라도 받아가는 게?

미스라 : 저는 당신처럼 인체를 수집하는 취미 없습니다.

오웬 : 나도 없어. 이 눈은 우연히 마음에 든 거야. 그래도 오즈의 팔이라면 갖고 싶은걸.

아서 : 오즈 님의 팔을 어떻게 할 생각이야?!

오웬 : 등이 가려울 때 쓸 거야.

미스라 : 그거 편리하겠네요.

오웬 :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게 해야지.

아서 : 지금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오즈 님은 해주실 거야. 내가 어릴 때도 몇 번이나…

오즈 : 아서… 아서, 이제 됐다. 잠자코 있어.

아서 : 그렇지만 오즈 님…

오즈 : …

오즈 : 《ヴォクスノク》


오즈가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새로운 인영이 나타났다. 남쪽의 마법사 피가로였다.


피가로 : 어라? 오즈, 네가 부른 거야?

오즈 : 후아… 약한 마법이라면 어떻게 쓸 수 있나 보군. 그렇지만… 졸려…

피가로 : 사람을 불러놓고 하품하지 마.


모두가 두려워하는 오즈를, 피가로는 가볍게 야단쳤다. 갑자기 불렸음에도 동요조차 없는 피가로에게 오즈가 고했다.


오즈 : 일시적으로 마력을 잃었다. 미스라와 오웬으로부터 아서를 지켜. 너라면 할 수 있지, 피가로.

피가로 : …

아키라 : 피가로라면 할 수 있어…? 남쪽 마법사들은 힘이 약한 거 아니었나요…?

오즈 : 피가로는 북쪽의 마법사다. 나보다도 오래 살았어.

아키라 : 네…!?


나는 놀라서 피가로를 봤다. 그렇지만 놀란 건 이 자리에서 나뿐인 듯했다. 아서도 미스라와 오웬도 알고 있었나 보다.


피가로 : 너 말이야…


피가로가 오즈에게 투덜거렸다.


피가로 : 매번 이런 식으로 내 슬로우 라이프를 방해하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

오즈 : 슬로우 라이프라는 것은.

피가로 : 느긋하고 평온한 생활이야. 전 현자님께 들었어. 알겠어, 오즈? 나는 선량한 일반 시민으로 있고 싶어. 남쪽에서 나는 그냥 조금 글러 먹은 아저씨란 말이야.

오즈 : 조금 글러 먹은 아저씨라는 것은.

피가로 : 루틸이나 미틸은 내 과거를 몰라. 피가로 선생님은 아무것도 못 하니까, 이렇게 말해주거든. 최고지?

아서 : 피가로 님은 무엇이든 해내실 수 있는 분이세요!

피가로 : 고마워, 아서. 아서는 변함없이 귀엽구나. 성격 나쁜 남자에게 길러졌는데도.


피가로는 아서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나를 돌아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로 : 아아, 현자님도 알아버렸네. 못 미더운 청년 느낌으로 소박하게 접근했었는데.

오즈 : 현자한테 접근했었나…

아서 : 현자님께 접근하셨었나요?



2화 달콤한 일시휴전

아키라 : 그게, 못 미더운 청년 느낌이나 소박하지는 않았는데요… 제대로 압력을 느껴서 무서웠어요…

피가로 : 거짓말. 다시 공부해야겠네. 무섭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미안해.


주눅 들지 않고 사과하며 피가로는 미스라와 오웬을 마주했다. 그는 진찰 전의 의사처럼 소매를 걷어붙였다.


피가로 : 어쨌든 이런 일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해줘. …그럼 미스라와 오웬의 상대였지?

미스라 : 싫은 남자가 왔네요…

피가로 : 나도 싫어. 너도 오웬도 만만치 않은걸. 이제 나이도 있고…

아서 : 피가로 님은 아주 젊으세요!

피가로 : 고마워, 아서. 기특하게 응원도 해주니, 피가로 님, 열심히 해볼까나.


피가로가 대담하게 입 끝을 올렸다. 미스라도 따갑게 살기를 내보였다. 그 순간…


미틸 : 피가로 선생님.

루틸 : 피가로 선생님 계세요~?


남쪽 형제가 나타나자 피가로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긴장감이 사라진 목소리로 상냥하게 돌아봤다.


피가로 : 무슨 일이니?

미틸 : 케이크가 나왔어요!

루틸 : 피가로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밤이 가득 올라가 있었어요! 같이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피가로 : 좋아! 먹을래 먹을래!

오즈 : …너, 네 생활방식에 의문은 없는 거냐.

피가로 : 잔소리가 많네. …그렇게 됐으니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게 됐어.

오즈 : …밤 때문에 떠나는 건가?

피가로 : 밤 같은 건 상인에게 가면 손에 넣을 수 있어. 저 아이들의 진심에 응해주려는 거지. 나는 선량하고 다정한 남자니까. 너도 미스라랑 사이좋게 지내. 케이크라도 나눠 먹으면서. 우정이나 애정은 좋은 거야.

루틸 : 피가로 선생님, 현자님네와 말씀 중이셨나요?

피가로 : 괜찮아. 이제 끝…

루틸 : 괜찮으시다면 여러분 몫도 이쪽으로 가지고 올까요? 잘라올게요.

아키라 : 아, 아니, 우리는…

오웬 : 케이크가 있구나?

아키라 : 앗…! 갑자기 뒤에 있어서 놀랐어요.

오웬 : 먹을까나.

루틸 : 그럼 가지고 올게요. 그럼 오즈 님과 아서 님과 미스라 씨는?

오즈 : 아니.

아서 : 나는 됐어.

미스라 : 가리비 껍데기 이외의 것이라면 먹겠습니다.

아서 : 역시 맛없었지.

미스라 : 전에 같은 걸 먹었을 땐 달고 부드러워서 맛있었는데요. 수확 시기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걸까요.

아서 : 아아! 그건 마들렌이야! 메이드에게 갖고 오도록 말해둘게.

오웬 : 케이크, 나는 많이 먹을래. 큰 접시에 담아와 줘.

루틸 : 알겠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시는군요.

오웬 : 응.

미틸 : 뭘 제일 좋아하세요? 있으면 가져올게요.

오웬 : 빨간 과일을 질퍽질퍽하게 찌부러트려서 설탕이랑 부글부글 끓인, 나아가는 상처 같은 식감인 거.

미틸 : 네…?



3화 교차하는 과거

루틸 : 잼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미틸 : 아, 아아,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오웬 : 크림도 좋아. 미끈미끈하고 푹신푹신하고 끈적끈적거리는 거. 다른 거에 비유하자면…

미틸 : 비, 비유하지 않으셔도 돼요. 괜찮아요.

오웬 : 그걸 입안 가득히 넣고 싶어. 입을 다물면 조금 튀어나올 정도로.

미틸 : 알겠습니다… 북쪽 마법사는 역시 뭔가 무서워요… 마음이 맞지 않을 거 같아…

루틸 : 그런 말 하면 안 돼. 게다가…

미틸 : 게다가…? 뭘 보고 계세요, 형님. 미스라 씨께 무슨 볼일이라도?

루틸 : 어머님의 지인일지도… 나중에 물어볼게. 그럼 여러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피가로 : 고마워, 루틸, 미틸.

오웬 : 케이크래.


오웬은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미스라도 분위기에 휩쓸려 전의를 잃었다.


미스라 : 밤이 돼도 따뜻하네요. 겉옷을 가져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오웬 : 단 럼주를 부은 질척질척한 것도 좋아. 그건 뭐라고 하는 걸까.


나는 감회가 새로워져 두 사람을 봤다.


아키라 : (저 두 사람… 무섭긴 한데 뭔가 적당하네… 어라…? 발코니 밑에 네로랑 누군가가 있었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브래들리 : 칫… 모처럼 밥이 얻어걸렸는데 방해하지 마. 무슨 일이냐, 네로.

네로 : 무슨 일이냐가 아니지. 소문으로 현자의 마법사가 됐다는 건 알았지만 언제부터 자유의 몸이 된 거야. <거대한 재앙>이 습격할 때 외에는 감옥에 갇혀있는 거 아니었어?

브래들리 : 맞아. 감옥에서 나와도 스노우와 화이트가 감시하고 있으니까 도망칠 틈이 없어. 그렇지만 얼마 전에 우연히 탈출했지.

네로 : 어떻게.

브래들리 : 재채기를 했더니 멀리 날아갔어.

네로 : …재채기?

브래들리 : 그래.

네로 : 엣취 하는 거?

브래들리 : 그래.

네로 : 이봐, 장난하냐.

브래들리 : 바보 같은 얘기지만 진짜야! 그때 이후로 재채기를 할 때마다 어디론가 날아가게 돼.

네로 : 진짜냐… 감기 걸리면 큰일이잖아.

브래들리 : 그때는 세계 여행이지. 칫…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결국 오즈에게 다시 끌려왔지만.

네로 : 재채기로 말이지…

브래들리 : 네놈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네로. 어느새 도적단도 해산해버렸고. 네놈이 이끌어주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로 : 난 이제 손 씻었어. 네놈의 일에는 어울려주지 않을 거야.

브래들리 : 그런 말 하지 마. 또 같이 하자고. 여길 빠져나가서 한탕하자.

네로 : 건실하게 살기로 했어. 말려들게 하지 마.

브래들리 : 건실? 무슨 일을 하는데.

네로 : …동쪽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어.

브래들리 : 네가 음식점? 아하하하!

네로 : …

브래들리 : 뭐, 나쁘지 않나… 네 밥은 맛있었으니까. 그래… 쓸쓸하지만 뭐, 됐어. 요리사든 기수(馬番)든 좋을 대로 해.

네로 : 그것뿐이야…?

브래들리 : 뭐가.

네로 : 나가면 죽여버린다고 했잖아.

브래들리 : 요리사를 죽여봤자지. 나도 붙잡혔고 지금은 현자의 마법사니 말이야.

네로 : …



4화 마법 과학 병단의 날개

브래들리 : 그래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로 : …뭔데.

브래들리 : 내가 잡힐 때, 너는 어디에 있었어? 너만 그 자리에 있었어도 내가 잡히는 일 따위 없었을 거야.

네로 : …

브래들리 : 원망하는 게 아니야. 계속 궁금했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하고. 말해, 네로.

네로 : 나는…

브래들리 : 아하하! 이봐 왜 그래. 심각한 얼굴 하지 마. 내가 너 때문에 잡힌 것도 아니고. 진실을 듣고 싶은 것뿐이야.

네로 : …

브래들리 : 네로…?

그림 속의 스노우, 화이트 : 꺄!

브래들리 : …!? 아파…!! 위에서 그림이 날라왔어!

네로 : 스노우, 화이트…?

그림 속의 화이트 : 우리라고 좋아서 날아온 게 아닐세!

그림 속의 스노우 : 오웬이 던져버렸단 게야! 불만이라면 오웬에게 말하게!

브래들리 : 칫… 오웬 녀석, 기분 나쁘니까. 언젠가 죽여버릴 거야…

네로 : 맞아, <거대한 재앙>의 상처 때문에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고 했었지…

그림 속의 스노우 : 불편하구먼… 으음…!?

그림 속의 화이트 : 하늘을 보거라, 네로, 브래들리!

네로 : …? 저건 뭐야…? 날개가 있는 마법사…!?

브래들리 : 아니… 하늘을 날고 있는 녀석, 마법사가 아니야…

그림 속의 스노우 : 중앙의 마법 과학 병단이구먼.

브래들리 : 마법 과학 병단…?

그림 속의 화이트 : 마나석을 동력으로 하여 기계로 마력을 제어하는 녀석들일세.

그림 속의 스노우 : 무너진 중앙 탑에서 무엇을 할 생각인 겐지…

루틸 : 현자님, 오즈 님, 저걸…!

아서 : 저건 우리나라의 마법 과학 병단…

빈센트 : 현자의 마법사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만, 기적이 아니라 희극밖에 보여주질 않아서 말이야.

오즈 : …

빈센트 : 우리 마법 과학 병단의 힘을 보여드리지.

중앙 사람 : 아…! 마법사다…!

중앙 사람 : 아니야, 달라… 저건 마법 과학 병단 아니야? 서쪽에서 기술을 배워왔다던 그거 말이야.

중앙 사람 : 뭘 하는 걸까. 설마 중앙 탑을 고쳐주는 건가?

중앙 사람 : 그렇다면 고맙지… 매일 보던 익숙한 풍경이 달라진다는 건 아무래도 쓸쓸하니까.

니콜라스 :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었다니… 나는… 아니, 내가 반드시 고쳐 보이겠어.

중앙 사람 : 니콜라스 님!

중앙 사람 : 마법 과학 병단 단장인 니콜라스 님이다!

니콜라스 : 중앙 탑까지는 수복할 수 없지만, 성 주변이라면 마법 과학 병단의 힘으로 충분히 수복할 수 있다. 봐라! 이게 마법 과학의 힘이다!

중앙 사람 : 와아…!

중앙 사람 : 대단해! 마법 같아…!

중앙 사람 : 이게 과학이라니 놀랐어! 과학이 있으면 마법사도 필요 없어!

중앙 사람 : 아하하하! 너무 그러지 마! 마법사들 그렇게 열심히 퍼레이드까지 했는데!

중앙 사람 : 하하하하!

미틸 : 저게… 마법 과학 병단의 힘… 뭔가요? 과학이란 건…

루틸 : 글쎄… 나도 잘…

샤일록 : 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인가요…


샤일록의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아득히 먼 하늘 아래를 보고 있었다.

 

 

 

5화 일그러진 기적

아키라 : 기분 나쁜, 가요…?

샤일록 : 기분 나쁜 것이죠.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쾌락은 제어가 안 돼요. 마법사처럼 마음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인간처럼 몸을 쓰는 것도 아닌, 돌의 힘으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모래사장에서 노는 아이처럼, 인간들은 세계를 다시 만들겠죠.

무르 : 뭘 보고 있어? 엄청난 거? 재밌는 거?

샤일록 : 당신에겐 대단하고 재밌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보세요, 세기의 천재 무르. 당신이 발명해낸 마법 과학 기술이 일그러진 기적을 일으키고 있답니다.

아키라 : 무르가 발명…?

샤일록 : 그래요. 마나석을 동력으로 한 마법 과학 기술을 발명한 건, 예전의 그예요. 무르는 철학자이자 발명가였으며 천문학자이자 광물학자이기도 한, 지적 욕구의 괴물이었어요. 그렇지만 자신이 밝혀낸 세계의 비밀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어 나갈지에 대한 거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저는 말렸는데.

무르 : 잘 모르겠어!


샤일록은 무르를 한번 보고는 빈정거리듯이 웃었다.


샤일록 : 그러시겠죠. 그래서 저는 당신이 싫었어요.


무르가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가로채듯이 빈센트 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빈센트 :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군. 마법사가 활약할 차례는 없겠어.

아서 : 숙부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아키라 : …


어느샌가 샤일록과 무르의 모습이 없어졌다. 대신에 피가로가 가까이에 서 있었다. 드물게 묘한 표정을 하고.


피가로 : …마법 과학 병단인가. 저런 게 늘어났다간 큰일이 날 거야.

아키라 : 피가로…

피가로 : 이대로면 마법사 사냥이 시작될 거야.

아키라 : 마법사 사냥…?

피가로 : 그래.

아키라 :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피가로 :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여기서는 조금.

빈센트 : 무슨 문제라도?

피가로 : 아닙니다. 왕제 전하.

시노 : …밖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히스클리프 : 무슨 일이지… 잠깐 보고 올게.

시노 : 그래.

메이드 : 저런 짓을 해봤자, 금방 다시 무너질 거야…

시노 : …

메이드 : 탑이 무너진 이유는 지진 같은 게 아닌걸…

시노 : 무슨 뜻이야?

메이드 :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시노 : 기다려.

메이드 : …

시노 : 무서워하지 마. 잡아먹거나 하지 않아. 맛있는 파이를 먹어서 배가 부르니까.

메이드 : 파이, 맛있으셨나요…?

시노 : 응.

메이드 : 저희 엄마가 만든 거예요… 엄마가 조리실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시노 : 너희 어머니는 천재야. 전해드려.

메이드 : 네… 후후, 기뻐할 거예요.

시노 : 그래서? 탑이 어쨌다고?

메이드 : 저 탑은 지진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에요. 지진 같은 건 없었어요. 저, 봤어요… 묘지에서 나온 커다란 그림자가 언덕을 타고 올라가 탑에 달라붙었던걸.
시노 : 그림자?

메이드 : 네… 커다란… 새의 그림자였어요.



6화 새의 그림자를 쫓아

히스클리프 : 새의 그림자? 구름의 그림자를 잘못 본 거 아니야?

시노 : 다른 몇 명에게도 물어봤지만 지진은 못 느꼈다고 말했어. 탑을 무너뜨린 뭔가가 있을 거야.

히스클리프 : 어디 가는 거야, 시노.

시노 : 묘지의 상태를 보고 올게.

히스클리프 : 지금!?

시노 : 응. 다들 여기서 묵는 거지. 아침에는 돌아올 거야.

히스클리프 : 혼자 가면 위험해.

아키라 : 여러분, 방이 다 준비됐나 봐요. 히스, 시노, 무슨 일 있나요?

시노 : 탑을 무너뜨린 괴물의 정체를 알아 올게.

아키라 : 괴물…? 역시 지진이 아니었구나…

히스클리프 : 현자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계셨나요?

아키라 : 제가 살던 세계는 지진이 잦았어요… 보통 탑이 무너질 정도의 지진이 있었다면 근처 지역도 꽤 흔들려요. 그렇지만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늘을 날고 있던 때였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나 동물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시노 : 메이드는 묘지에서 나온 새의 그림자가 탑에 달라붙었다고 말했어.

아키라 : 고대 생물이라면 스노우와 화이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시노 : 물어봐 줘. 그럼 갔다 올게.

히스클리프 : 기다려!

시노 : 뭐야.

히스클리프 : …위험하잖아, 같이 갈게.

시노 : 히스가? 한밤중에? 묘지를? 마법사인 주제에 유령을 무서워하면서?

히스클리프 : 시끄럽네.

아키라 : 둘만 가는 건 걱정돼요. 저도 같이 갈게요.

히스클리프 : 현자님이야말로 위험해요.

시노 : 너는 의지가 안 되잖아.

히스클리프 : 시노.

시노 : 위험합니다, 현자님. 얌전히 침대에서 자고 계세요.

아키라 : 그럼, 누군가 같이 가줄 사람을…

파우스트 : 아직도 방으로 가지 않았나. 파티는 끝났잖아.

네로 : 당신이 낮잠 자는 사이에 말이야.

히스클리프 : 파우스트 선생님, 네로.

시노 : 어딜 갔던 거야?

네로 : 식량창고.

파우스트 : 식사를 하지 못해서 말이야. 네로가 슬쩍해준 술로 지금부터 반주하려던 참이지.

히스클리프 : 둘이서?

파우스트, 네로 : 그럴 리가.

파우스트 : 혼자서.

네로 : 개인적으로 즐길 거야. 반주란 건 그런 거지.

아키라 : 동쪽의 마법사는 정말 혼자인 걸 좋아하네요… 파우스트, 네로. 자기 전에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네로 : 에…?

파우스트 : 싫은데.

아키라 : …

시노 : 괜찮아. 나랑 히스가 갔다 올게.

히스클리프 : 시노, 기다리라니까! …그럼, 현자님, 선생님, 네로, 안녕히 주무세요.

파우스트 : 어딜 가.

네로 : 중앙은 치안이 좋다고 해도 밤에 모험을 하긴 아직 이른 거 아니야?

히스클리프 : 사실은…

파우스트 : 정말이지… 왜 내가 이런 일에 어울려줘야 하는 거야.

히스클리프 : 죄송해요, 선생님.

네로 : 애들만 가긴 위험하다고 현자씨가 말하기도 전에 말한 건 당신이잖아. 귀찮아하면서도 의외로 성실하네.

파우스트 : 동행하고 있는 너도.

아키라 : 두 사람 다 친절해요.

네로 : 당신까지 따라오지 않아도 됐는데. 현자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높으신 분들에게 혼날 거 같아.

아키라 : 높으신 분들이라니 누굴 말하는 건가요?

네로 : 오즈나 스노우랑 화이트?

아키라 : 죄송해요… 성 밖의 세계도 봐보고 싶어서.

파우스트 : 지루한 풍경이지. 밤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아키라 : 어두우니까요…

파우스트 : 맞아. <거대한 재앙>을 기피하면서도 <거대한 재앙>의 빛을 의지할 수밖에 없어. 우리는 제멋대로인 생물이야.

시노 :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어.

히스클리프 : 시노, 혼자 먼저 가지 마!

파우스트 : 큰 소리를 내지 마라, 히스. 망자가 눈을 뜬다.

히스클리프 : …읏, 네…



7화 영웅이 되지 못한

네로 : 뭐야, 무서워? 네가 죽인 녀석들이 여기 잠들어 있는 거야?

히스클리프 : 죽이거나 하지 않아…

네로 : 그럼 무서워할 필요 없잖아.

파우스트 : 시노, 어딜 향하고 있는 거야.

시노 : 저 언덕도 묘지인 거 아니야?

파우스트 : 아니. 저기는 처형의 언덕이다. 죄인이 처형당하고 옆에 묻히지.

히스클리프 : 처형의 언덕…

시노 : 죄인이라니? 도적 같은?

네로 : 그렇네… 묻어주기라도 하니 고마운 얘기지.

파우스트 : 도적이나 살인자, 그리고… 시대의 정의가 될뻔했던 자들.

시노 : 시대의 정의가 될뻔했던… 영웅이 되지 못한 사람이 죄인?

파우스트 : 그래.

시노 : 어째서.

파우스트 : 어째서일까.

시노 : …

파우스트 : 간다. 날 따라와. 나에게서 떨어지지 마.

레녹스 : …

루틸 : 레녹스 씨, 잠이 안 오세요?

레녹스 : 루틸… 조금, 그리워서.

루틸 : 그리워…? 이 성에 오신 적이 있으세요?

레녹스 : 먼 옛날에.

루틸 : …

레녹스 : 간다. 날 따라와. 나에게서 떨어지지 마. 이렇게 말하며 달려가던 사람의 등을 계속 쫓아갔었지… 이상적인 시대를 목표로 하며…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루틸 : 레녹스 씨… 아… 저 초상화는… 옛날 임금님의 초상화일까요…?

레녹스 : 알렉·그랑벨. 초대 국왕… 당신은, 어째서, 단 하나뿐인 친구였던 마법사를, 화형에 처하게 하셨습니까…

아키라 : 밤의 묘지는 무섭네요…

히스클리프 : 맞아요…

시노 : 밤의 묘지에서 무서운 건 망령보다도 무덤 도둑이야. 그 녀석들은 뭐든지 훔쳐서 팔아. 발견되면 묘지에 산채로 묻히고.

히스클리프 : 만난 적이 있어?

시노 : 응. 처음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라고 생각했어.

파우스트 : …이 묘지에도 무덤 도둑이 나타났을지도 모르겠군.

아키라 : 에…

파우스트 : 파헤쳐져 있어.

네로 : 정말이네… 파낸 흔적이 있어…

히스클리프 : 너무해… <거대한 재앙>이 와서 다들 힘들 때…

시노 : 읏샤…

히스클리프 : 시노! 무덤에 들어가지 마!

시노 : 봐. 매장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어. 진주도 돈도 남아있어.

네로 : 그럼 뭐 때문에…

파우스트 : 시체는?

아키라 : 에…?

파우스트 : 관 안에 시체는 들어 있어?

시노 : 확인해 볼게.

네로 : 무겁지. 도와줄게.

히스클리프 : 관을 여는 건가요!? 죽은 사람이 잠들어 있는데…

파우스트 : 네 말대로야, 히스. 망자에게는 깊이 사죄하도록 하지. 내가 기도를 올리겠어. 그렇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어. 확인해 줘.

아키라 : 신경 쓰이는 거라니…

파우스트 : 우리 마법사는 마음이나 자연의 신비한 힘을 쓰지. <거대한 재앙>도 그중 하나야. <거대한 재앙>이 가까워 지면 그 신비의 힘도 강해져. 세계가 위험에 처했는데 불경할지도 모르지만, 그 시기를 노려 의식을 치르는 자도 많아.

히스클리프 : <거대한 재앙>의 힘을 빌려 모종의 의식을 치른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파우스트 : 그래.

시노 : 이건…



8화 묘지를 떠도는 영혼

시노 : 이건…

히스클리프 : 어… 어떤데.

시노 : 비었어.

히스클리프 : 비었어…?

네로 : 관 안에는 뼈 한 조각 안 들어있어. 어쩌면 다른 무덤도 전부 똑같을지 몰라…

시노 : 몇 개 확인해 보고 올게.

히스크리프 : 나… 나도 도와줄게.

시노 : 무리하지 마. 너는 관에 손대지 않아도 돼. 현자님이랑 같이 있어.

히스클리프 : 알았어…

네로 : 기분 나쁜 바람이야…

파우스트 : 망령들이 화내고 있어. 착각하지 마. 우리는 너희를 파헤치러 온 게 아니야.


기분 나쁜 바람이 불었다. 눈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얼굴을 한 하얀 연기 같은 게 묘지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파우스트가 눈을 감았다.


파우스트 : 《サティルクナート•ムルクリード》

마치 기도와도 같이 고요하게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에서 오래된 거울이 나타났다. 밤의 어둠과 달의 빛을 엄숙하게 비췄다.


파우스트 : 잠들어라. 떠도는 영혼들이여. 밤의 정적에서 편히 눈감기를.


탄식하듯이 묘지의 나무들이 흔들렸다. 천천히 바람이 멎어 들기 시작했다.


파우스트 : …

시노 : 파우스트. 몇 개 열어봤지만 전부 비어있었어.

파우스트 : 그런가.

네로 : 여기도 마찬가지야. 매장품은 어떻게 할래?

파우스트 : 매장품?

네로 : 돈 될만한 것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어. 주인도 전부 저세상에 있고. 훔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파우스트 : …

네로 : 아, 농담농담.

파우스트 : 질이 나쁘군.

히스클리프 : 저주받을 거야, 네로!

네로 : 미안미안.

시노 : 나는 네로에게 찬성이야. 망자에게 금화를 줄 바에야 굶주린 아이들에게 주면 좋을 텐데.

히스클리프 : 망자의 추억이 담겨있어. 죽은 뒤에도 그 사람들의 물건이야. 그러니…

히스클리프 :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파우스트 : 네로. 그 자리에서 뛰어봐.

네로 : 안 훔쳤다니까!

시노 : 저거 아니야? 봐, 저쪽에 목줄이 떨어져 있어.

히스클리프 : 목걸이.

시노 : 목걸이가 말이야.

파우스트 : 시노, 멈춰. 가까이 가지 마.

시노 : 왜.

파우스트 : …조금 전까진 거기에 없었어.


바람이 낮게 신음했다. 밤하늘에 빛나는 달이 빛을 더해갔다. 햇빛을 받아 꽃이 피는 식물처럼 목걸이의 보석도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목걸이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시노 : 조심해, 현자.

아키라 : 네…?

시노 : 셔우드의 숲과 똑같은 느낌이야. 기분 나쁠 정도로 힘이 흘러넘치고 있어.

파우스트 : <거대한 재앙>이 이 세계에 너무 가까워진 영향이겠지. 멸한 것이 되살아나고, 잊혀진 것이 이름을 기억해 내고, 풍화됐을 집념이 재연됐어. 그것들이 <거대한 재앙>의 힘을 얻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거야.

아키라 : …!


순간, 목걸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 부신 빛이 묘지를 비추고 폭풍과도 같은 거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날아갈 뻔할 때 네로가 나를 안고 날아올랐다. 그는 나뭇가지에 착지해 내 상태를 살폈다.



9화 목걸이의 집념

네로 : 현자씨, 괜찮아?

아키라 : 네로!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네로 : 별말씀을. 당신한테 무슨 일 생겼다간 높으신 분들한테 혼나니까. 저것보다 그쪽이 더 무서운 것뿐이야.


나뭇가지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목걸이의 빛은 이제 일곱 빛깔로 파도치며 거대한 눈알 같은 모양으로 부풀고 있었다. 묘지 전체를 덮을 정도로 꺼림칙하고 광대한 빛이다. 거세게 날뛰는 바람과 빛을 맞으며 시노가 주문을 외웠다.


시노 : 《マッツァ•スディーパス》


그러자 그의 손에는 그의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낫이 나타났다. 날카롭고 흉악한, 그러나 순수한 은색 날의 빛은 시노 그 자체처럼 보였다.


히스클리프 : 시노…!

시노 : 맡겨둬. 내가 할게.


말을 끝내자마자 시노는 그 꺼림칙한 빛을 향해 뛰어들었다. 사신처럼, 가볍게 대낫을 휘둘러 눈 깜짝할 사이에 빛을 갈랐다. 꺼림칙한 빛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점점 약해져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보석을 부수기 위해 시노가 기세 좋게 대낫을 치켜들었다.


시노 : 이걸로 끝이다. 좀 더 얌전한 목줄이었다면 마님께 선물로 드렸을 텐데. 아쉽지만 너는 예의가 없어.

아키라 : …


시노의 대낫이 밤바람을 가르고 목걸이의 보석을 쳐냈다. 보석은 부서지며 소멸해갔다. 그 자리엔 달빛을 받으며 대낫을 쥐고 있는 시노의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네로 : 대단하네, 너.


네로가 감탄하자 시노는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노 : 뭐 그렇지.

히스클리프 : 여전히 무리한 짓을 하는구나. 시노는…

시노 : 불평을 말하기 전에 칭찬부터 해. 가신에게 있어서 주군의 칭찬은 기쁨이자 양식이야.

히스클리프 : 그런 말, 어디서 배운 거야?

시노 : 비밀. 파우스트, 당신도야. 선생님이잖아.

파우스트 : 잘했어. 그렇지만 마무리가 어설퍼.

시노 : 마무리가 어설퍼?


파우스트는 시노가 있는 방향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직후 시노의 뒤에서 그의 목을 노리며 날아온 파편이 공중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시노 : …!


놀란 시노가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파우스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맑은소리가 울려 퍼지자 파편이 모래처럼 흩어져갔다.


파우스트 : 그렇지?

시노 : 칫…

히스클리프 : 혀 차지 마. 그 전에 감사하다고 해야지.

시노 : …감사.

파우스트 : 흥…


파우스트는 작게 웃은 뒤 가늘게 뜬 눈으로 바람에 날려가는 모래를 쫓았다. 목걸이에 깃들어있던 무언가에게 말을 걸듯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파우스트 : 사라지는 게 좋을 거다. 네 원망이 얼마나 깊다 하더라도, 네 분노가 얼마나 격하다 하더라도… 나만큼은 아니잖아.

아키라 : 파우스트…?

파우스트 : …혼잣말이야. 돌아간다. 새의 그림자는 찾지 못했지만 수확은 있었어. 현자, 뒷일은 맡기지.

아키라 : 네. …네!?

파우스트 : 나는 히키코모리야.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른 마법사들에게 인계해 줘.
시노 : 어째서야. 내일도 조사해보자.

히스클리프 : 저, 저도 조사해보고 싶어요. 선생님도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파우스트 : 하? 싫은데.

네로 : 뭐, 내일 높으신 분들에게 보고하는 걸로 하자. 오늘 밤은 돌아가는 거야.

시노 : …알았어.


이렇게 우리는 묘지를 뒤로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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